차이나타운, 인천이주 화교의 역사

대한민국에서 다문화를 점할 수 있는 지역은 안산시 원곡동과 서울 이태원, 그리고 인천의 북성동(차이나타운)이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이주민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공화춘과 같은 중국음식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인천에서 깊게 뿌리내린 화교들의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교

인천 화교들은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역과 노동을 위한 경제적 이유, 자국 내의 정치적 혼란 등을 피해 안전한 곳에 정착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국과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화교의 시작, 임오군란

화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임오군란”입니다.

고종 19년(1882년) 무위영, 장어영 소속의 군대와 별기군을 차별하며 일어난 임오군란은 정부에서 반란 수습을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들어오게 된 청나라군과 함께 동행하여 들어온 상인 40여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년) 체결로 인천에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

또한 거주지 확보를 위한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을 체결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 화교가 들어오게 된 이후 화교 인구가 점차 늘어나 원세계는 조선정부와 협의하여 “삼리채확충화장정(1887년)을 체결하였습니다.

화교의 직업

화농

농사를 짓는 화교를 화농이라고 합니다.

화농은 인천에서 처음으로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1887년)

이들은 산동성출신으로 채소 종자를 산동과 인천간 정기운행 하던 선박을 이용해 산동 옌타이시에서 가지고 와  농사를 지었습니다.

인천지역 화교는 대부분 산동성으로부터 이주했으며, 산동선의 주요농업은 곡식재배(밀, 수수등) 채소재배(양배추, 가지, 배추)등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상에 채소를 내놓고 소매로 판매하다가 신포시장에 부동산이 있던 화상 “진덕흥”의 건물에서 채소를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화교 상설 채소시장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1911년 인천 농업공의회가 조직되어 화농을 중심으로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신정(현 신포동) 채소시장에서 판매되는 채소는 화농이 재배한 것이 전체의 90% 이상이였습니다.

화농의 채소가 독점적으로 판매되는 것을 지켜보던 일본인과 인천부청에서는 채소시장을 공설시장으로 만들고 채소시장의 면적을 확장하여 화교와 일본인, 조선인 모두가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쿨리

항구나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거나 인력거를 끌기도 하는 등 특별한 기술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을 대부분 쿨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호밀빵 같은 손수 만든 찐빵을 허리에 여러개 두르고 다니며 끼니를 떼웠습니다.

가끔 야채(부추, 대파, 마늘등)과 함께 먹기도 하고 생두부나 양파를 사서 면장(중국된장)을 찍어먹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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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
쿨리

싼바다오

화교들이 외국에 정착을 할 때면 세 자루의 칼 싼바다오((三把刀)가 생계수단이였습니다.

음식점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일 육도(肉刀와 채도(菜刀),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인 전도(剪刀)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인 剃刀입니다.

이말은 화교들이 음식점, 양복점, 이발소에 종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재단사

우라가미 양복점에서 고급 양복을 싸게 만들어 파니 여러분이 와서 옷을 맞추세요,

가을 옷과 겨울 옷을 꼭 맞게 만들어 드립니다.

위치는 닛센해운 앞입니다.

1987년 독립신문에 “원태양복점(서울정동)의 광고가 실렸습니다.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양복의 수요가 많았습니다.

1923년 기준으로 인천에는 3개의 양복점이 있었습니다.

저렴하면서도 양복 제조기술이 좋았던 화교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과 조선인이였습니다.

인천 신포시장에 가면 중국식 양화를 할 수 있는 양화점이 한군데 있습니다.

요리사편

산동에서 이주한 요리사는 쿨리들에게 고향음식을 싼 값에 먹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미리 삶아 놓은 면과 볶아놓은 중국식 된장을 항구나 공사현장으로 가지고 갔다가 노동자들이 오면 면에 면장을 얹어주었습니다.

쿨리
쿨리

이렇게 짜장면은 점차 대중화되면서 고급 중화요리집이었던 공화춘에서도 짜장면을 맛보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발사

이발사도 재단사와 비슷한 시기에 발전을 하였습니다.

1910년 이발이 대중화되면서 1924년 인천에는 35개의 이발소가 생겼습니다.

그중 일본인이 운영하는 이발소가 15개로 가장 많았지만 화교가 운영하는 이발소도 8군데 있었습니다.

당시 화교의 이발소는 타 시설에 비해 위생적이지 않지만 이발요금이 저렴하고 서비스가 좋아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발영업취제규칙이 공표되고 일본인, 조선인이 운영하는 이발소와 같은 요금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화교 이발소는 점차 쇠퇴하여 1942년 5개로 줄었고,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화교의 2세대

인천항이 외국인에게 개방된 후 인천을 고향으로 하는 화교 2세대가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화교는 자녀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화교가 있는 곳에는 화교학교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화교학교는 1901년 건립된 인천의 “중산화교소학교“입니다.

현재 화교는 5세대로
2005년 8월에는 선거법이 개정되며 한국의 화교들에게 지방선거권이 생겼습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부터 화교들은 지방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인천 차이나타운을 인천항구를 끼고 있는 곳으로 무역도 활발하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무역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화교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매력있는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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